- 강왕기 대표춘천양조장
“왕에게 바친다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교감하며”
50여년 역사 양조장에서 술 빚는 막걸리 명인
지난 5월 10일 개최된 2024 대한민국 막걸리엑스포는 십여년 전부터의 막걸리열풍이 단지 휘발성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행사였다. 특히 막걸리를 즐기는 MZ세대가 늘고 있음은 막걸리의 미래에 신뢰를 보내게 하는 고무적 현상이었다.
막걸리엑스포가 진행된 서울 서초구 aT센터는 사흘 내내 북적였다. 둘째 날인 토요일, 그보다는 조금 못 미첬지만 마지막 날인 일요일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준비한 물량을 완판한 부스도 연이어 나왔다.
춘천양조장도 그 중 하나다. 중장년층보다는 MZ세대가 행사장에 많이 찾을 것으로 판단해, 3종의 주력 제품 중 젊은층의 취향을 고려해 출시한 ‘춘천수제막걸리’를 훨씬 많이 챙겼지만, 준비한 100박스 모두 동이나 마지막 날엔 시음조차 할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막걸리엑스포의 열기가 가라앉은 며칠 후 강원도 춘천시 석사동에 위치한 춘천양조장을 찾았다. 고층 건물과 아파트에 둘러싸인 대지 550평 양조장은 시간이 멈춰버린 외딴 섬과 같았다. 철문 너머 마당 한켠에는 세월을 잊은 듯 정겨운 연탄이 넉넉하게 쌓여있었고, 드라마 시대물 세트장같은 단층 건물에는 ‘사입실’ ‘인입실’ ‘증미실’ ‘발효실’ 등과 같은 빛바랜 나무 표지판이 입구마다 걸려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옛날 방식 그대로 막걸리를 빚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곳 작은 사무실에서 양조장 대표를 만났다. 보통, 부스를 찾은 참관객에게 시음 잔을 건네는 관계자와 달리, 관람객 이동 통로까지 나와 자사 막걸리의 시음을 권하는 열정이 돋보였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춘천양조장 강왕기 대표. 양조장 입구에 걸린 ‘한국무형문화유산 전통막걸리 명인’ 현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 연유로 춘천양조장 제품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사단법인 한국무형문화예술교류협회의 명인 엠블럼이 붙어있다.
명인이 만든 술! 그렇다면 으레 비쌀 것 같다는 게 통념이다. 하지만 강왕기 대표의 춘천양조장 막걸리는 그렇지 않다. 아마도 ‘명인’ 타이틀을 가진 인물이 만든 대한민국 술 중 가장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제품이지 않을까 싶다. 주력제품인 ‘춘천왕수생막걸리’, 일대 마트에서 1,600원 정도면 살 수 있다. 조금 더 고급제품인 ‘춘천수제막걸리’도 판매처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2,500원 남짓이면 구한다. 모르고 마셔도 마실 만 하지만, 천원짜리 두세장으로 명인의 막걸리를 마신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이 막걸리 더 근사해 보인다.
학창시절 ‘왕수’라는 별명을 막걸리 브랜드화
반백년이 넘는 역사의 춘천양조장은 1968년 춘천 일대의 9개 양조장이 통합하며 춘천합동주조로 출범했다. 식량 부족의 시대, 쌀막걸리의 제조를 전면 금지하던 양곡관리법으로 자연스레 밀막걸리가 주력이었고, 통합된 양조장들은 지역의 시장을 지배하며 엄청난 활황을 구가했었다. 주유소 하나 갖고 있으면 재력가였고, 택시 한 대 굴리면 자식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고, 담배 판매권 하나면 굶을 일 없던 시대에 양조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지역 유지 신분의 보증수표였다.
“함양의 하동정씨 종갓집에서 술을 빚던 어머니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지만, 제가 처음부터 양조업을 한 사람은 아닙니다. 삶의 끝지점이라 생각했던 시기에 운명처럼 막걸리를 만들게 됐고, 그로 인해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사람과 더불어 어울리며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죠.”
강왕기 대표는 원래 서울에서 유제품 유통업을 했다. 대리점 중 매출 순위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극심한 스트레스로 한순간 우울감에 빠지고 공항장애까지 겪는다.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마음의 수양을 위해 일손을 놓고 5년여 전국을 유랑했다. 그 무렵 경영이 악화되어 잠시 문을 닫고 있던 춘천의 한 양조장과 만난다.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지금은 막걸리협회 및 지역단체 일을 도맡아 하는 아내(권인숙 전무)를 비롯해 주위에서 반대도 많았지만, 저는 나이가 들어서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돈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고민하지 않고 양조장을 인수해 막걸리 일을 시작하게 됐지요. 아마 그때, 그 돈으로 서울에 건물이나 사 뒀으면 지금처럼 고두밥 주무르고, 막걸리병 짊어나를 필요가 없었겠지만, 그건 제가 추구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2010년 춘천양조장을 새롭게 이끌게 된 강대표에게 당장 시급한 일은 쌀막걸리 개발이었다. 그때까지 춘천양조장에서는 밀막걸리만 만들고 있었다. 양조장이 침체하게 된 데는, 쌀막걸리를 선호하는 시대의 변화에 뒤따르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쌀막걸리 개발을 위해 양조장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래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아예 양조장 발효실에서 한달간 잠을 자며 24시간 관찰하고 연구하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제가 가진 막걸리 철학은 그때의 경험과 깨달음이 바탕이 되어 정립된 것입니다.”
한밤중 발효실에서 홀로 눈을 부치던 강대표는 ‘탕!탕!탕~’ 전쟁이라도 난 듯한 요란한 소리를 듣는다. 막걸리를 발효하는 스테인레스 탱크 안의 미생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스테인레스 옆면을 때리는 소리였다. 깜짝 놀라 불을 켜니 소리가 잠잠해졌다. 스테인레스 탱크를 주먹으로 살짝 때릴 때도 발효가 잦아들었다. 탱크 속에서 뽀글뽀글 발효되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탕탕 소리를 낼 정도로 요란하게 뒤집어놓으며 발효되는 모습을 본 적 없었다. 새벽 2시에서 4시, 딱 그 시간이었다.
“막걸리를 만드는 미생물의 존재를 실감나게 느꼈습니다. 사람의 영혼도 딱 그 시간에 움직인다잖아요. 고사를 지낼 때 왜 막걸리를 뿌리는가도 이해가 됐습니다. 사람의 영혼과 막걸리 미생물은 서로 교감하는 ‘친구’와 같습니다. 그래서 막걸리 만드는 일은 좋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도 오전에 쌀을 씻고 해가 저물 때쯤 평상에 고두밥을 식혔다가, 한밤이 되어서야 깨끗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술을 빚으셨습니다. 항상 우리 집 술이 최고라는 찬사를 받곤 했지요.”
춘천양조장의 막걸리 제품에는 ‘왕수’라는 명칭이 함께 붙는다. 고등학교 때 화학선생님이 강‘왕’기 대표가 돌멩이처럼 땡글하게 생겼다며 붙여준 별명인데, 막걸리 명칭으로 브랜드화 한 것. ‘왕에게 바친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막걸리를 빚는다’라는 의지를 담은 브랜드명이라고.
막걸리와 함께 하는 어울림의 철학
‘명인’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강왕기 대표는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이른바 고도수 프리미엄 막걸리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지는 않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를 수 있지만, 그의 철학에 의하면 막걸리는 사람들과 편하게 어울리며 함께 나누는 술이다. 막걸리 도수가 높으면 주거니받거니 마시기가 곤란하다(막걸리와 소주는 잔부터가 다르다). 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가격도 부담이다.
“비싼 막걸리가 좋은 막걸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계속 얘기하지만 ‘막걸리는 살아있는 예술’입니다. 혼과 정성을 얼만큼이나 담았느냐에 따라 제맛이 나오지요. 저는 매일 우리 양조장 막걸리를 한 모금씩 맛봅니다. 일부러 유통날짜를 넘겨놓고 어떻게 변하는지도 맛봅니다. 제가 만들었지만 감탄합니다. 부드럽게 풍미에 탄산이 은근하게 올라오는 그 맛! 제가 실험을 다해 봤는데, 그래도 제일 맛있을 때는 유통기한 끝까지 김치냉장고에 보관했다가 먹는 겁니다.”
오랜 양조장에서 전통방식 그대로 빚어서인지 확실히 이곳 막걸리는 남다른 풍미가 있다. 누룩 넣은 고두밥을 보쌈 방식으로 꼬박 하루를 묵혀 발효시키며, 오동나무틀에 넣어 또 하루를 발효시킨 후 비로소 탱크 속으로 들어간다. 이 작업들은 모두 기계가 아닌 손으로 이루어진다.
“양조장이 세워졌을 때의 그 방법 그대로입니다. 양조장 벽면에서는 아직도 왕겨가 흘러나오고, 오동나무틀 역시 예전부터 사용해오던 그 도구들입니다. 다른 나무로는 안됩니다. 오동나무에 고두밥을 재워놓으면, 습도를 쫙 빨아들이게 되죠.”
소매가로 거금(?) 2천5백원이나 주어야 하는 춘천양조장 프리미엄제품인 춘천수제막걸리는 춘천왕수생막걸리에 비해 값비싼 누룩과 올리고당을 훨씬 더 듬뿍 넣었다고 한다. 도수는 젊은 층 취향에 맞춰 5도. 입안을 감도는 은근한 단맛에 풍미가 뛰어나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밀로 만든 ‘춘천생막걸리’가 좋았다. 밀막걸리 많이 먹던 나이 든 연배가 좋아하는 술이라는데, 연식이 좀 띠가 나도 어쩔 수 없다. 쌀과 혼합하는 곳은 있어도 100% 밀로만 만드는 곳은 춘천양조장이 유일하다고 강대표는 말하는데, 나중에 조사해보니 그건 꼭 그런 것같지 않다. 그런데 용량이 1.7ml다. 보통 막걸리 용량의 2배가 훨씬 넘는다. 그런 용량의 100% 밀막걸리를 저렴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으로선 아마도 독보적일 것 같다.




